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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 뽑은 한 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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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아의 세계』_한 단락 2015.09.25

 

 

 

제3장

양수와 고대 해수

 

 

- 출산

 

 

의과대학 실습 가운데 ‘산박(産泊)’이라고 해서, 산부인과 분만실에서 하룻밤 묵으며 출산 과정을 지켜보는 시간이 있다.

학부 3학년 때의 일로 확실히 기억한다.

출석부에 적힌 번호 순으로 일정을 짜서 두 사람씩 산부인과 병동 당직실에 머물며 분만실에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다.

산부인과 병동은 메이지 시대에 세운 목조 건물로 고즈넉한 풍취를 자아냈고,

 병동을 에워싸는 나무숲이 부드러운 햇살을 받아서 지나다니는 임산부들을 따스하게 지켜주었다.

그날 밤 나는 같은 과 친구인 M과 함께했는데, 환자용 침대에 잠시 누워 있을 짬도 없이 곧바로 연락이 왔다.

곧이어 방안 가득히 넘쳐흐르는 생명 탄생의 긴박한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임산부의 허벅지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소리,

그리고 거기에 더해지는 산파의 부드러운 목소리…….

그것은 일본 노가쿠 무대에 선 주인공의 마음을 든든히 떠받치고 있는 합창 하모니의 세계였다.

이미 분만실 전체가 거대한 내장으로 변신해서 깊은숨을 내쉬고 있었다.

난생처음 피부로 맛보는 공기였다.

그 방에는 주위 병동과는 격리된, 하나의 생명 공간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분만실 실습이 있던 그즈음 또 하나의 임상 실습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수술 견학이었다.

그 둘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수술실 현장 실습도 출석부 번호 순으로 일정이 꾸려졌고, 나는 시내 병원의 정형외과 수술실을 견학하기로 되어 있었다.

수술 준비실에서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달랑 속옷 하나 빼고는 모두 벗겨진 뒤,

수술복에 수술 모자, 그리고 무시무시한 마스크로 완전히 밀봉되었다.

 실내용 샌들로 갈아 신고 불안한 발걸음을 이끌고 들어간 수술실에는 바닥도 벽도 모두 하얀 타일로 뒤덮여 있었다.

온몸을 새하얗게 무장한 의사와 간호사는 역시 하얗게 칠해진 철제 수술대를 에워싸고 분주히 움직였다.

 마치 얼굴을 가린 ‘백(白)의 암살자’를 떠올리게 했다.


수술은 반으로 깨진 무릎뼈를 접합하는 일이었다.

“드릴!” 하고 수술 집도의가 말하면 바로 드릴 금속을 전한다.

“철사!” 하고 말하면 번쩍 빛나는 20센티미터 정도의 철사를 핀셋으로 집어 건넨다.

무릎 위쪽은 넙다리네갈래근(대퇴사두근)이 수축한 탓에 넓적다리 중간되는 위치가 부풀어 올라 있다.

이를 힘껏 끌어내려서 무릎 아래쪽과 철사로 묶어 이어야 하는데, 이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아, 어쩌지. 철사가 끊어질 것 같은데…….’

어느새 내 눈앞은 캄캄해지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콘크리트 복도 구석에 쭈그리고 있었다.


산부인과 분만실과 정형외과 수술실의 하늘과 땅 차이, 이것은 과연 무슨 차이일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산파의 평상복과 새하얀 수술복의 차이가 아닐까?

 

이와 비슷한 일을 최근에도 경험한 적 있다.

숲이 우거진 시골 보육원에서 보모를 대상으로 강연회를 열었을 때였다.

아이들이 뛰노는 드넓은 강당 중간에 200명 가까이 모인 보모들은 각양각색의 평상복 차림이었다.

그 순간 간호학교의 질서 정연하고 일사불란한 ‘백의(白衣)의 천사’ 모임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내가 몸담아온 의학의 세계는 백의, 하얀 가운으로 상징되는 세계가 아닐까 싶다.

이 세계는 임상 현장에서도 연구실에서도 모두 흰옷 차림이다.

병실, 외래 진찰실, 연구실, 실험실, 그리고 해부실까지 모든 공간이 하얀 가운을 빼놓고는 상상도 할 수 없다.

더욱이 백의는 교실 안까지도 깊숙이 파고들었다.

교단에 서 있는 사람도, 책상에 앉아 있는 사람도 암묵적인 합의하에 모두 하얀 가운을 입는다.

하얀 가운은 의사의 유니폼이라기보다 그것을 걸치는 일 자체가 엄숙한 의식(ceremony)으로 변모한 듯하다.

이 의식은 의료 세계에서 그 주변부인 의료 보조 영역까지 침투했고, 심지어 온천장에도 미쳤다. 


도대체 흰옷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런데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흰옷 숭배가 비단 의학 세계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신부가 입는 하얀 웨딩드레스에서부터 상복으로 입는 하얀 소복까지

육체의 순백을 증명하는 복식 문화에도 면면히 전해져 내려온다.

이는 갓난아기의 마음을 백지,

즉 타불라 라사(tabula rasa, 일체의 경험 이전에 빈 백지처럼 비어 있는 마음 상태를 이르는 말—옮긴이)에 비유함으로써

생명 기억의 세계를 완전히 말살하려는 근대 심리학의 동향까지 떠올리게 한다.

 이쯤 되면 흰옷이 의미하는 바는 말 그대로 ‘무균’의 증명이라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이 나지 않는다.


메이지 시대 초기, 서양 의학이 정통 학문으로 정부의 인정을 받게 된 것도

천연두에 대처하는 종두소의 힘겨운 설립과 수십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콜레라 방역 대책의 성과였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세균 감염과 발병’,

그리고 ‘세균 박멸과 치료’라는 만인이 인정하는 ‘원인과 결과’의 도식이 뜬금없이 대의명분으로 돌변해서,

전통적인 동양의학을 차츰차츰 민간의 한쪽 귀퉁이로 내몰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개항기 시절, 검게 칠한 서양 흑선(黑船)이

신형 세균을 자신들의 전용 역학(疫學)과 끼워팔기식으로 일본에 가져온 것은 아닐까?

바로 이것이 역사의 필연에 근거한, 서양 의학의 도래 경위라고 짐작되는 바이다.


그렇다면 동양 의학은 도대체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동양 의학은 세균과 공존하는 세계다.

따라서 동양 의학에서는 항상 세균과의 공존이 가능한 체질을 화두로 삼는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저항력’이라는 단어는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예방’ 혹은 ‘박멸’이라는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는 세균을 적성국으로 간주하는 인간 정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서양 의학의 의지적인 발상은 애초 동양 의학의 세계에서는 자라날 수가 없다.


이처럼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의 특징적인 모습은 순백의 시트 때문에 철거당하고 있는,

시골 토방 안쪽에 짚을 깐 좌식 이부자리의 세계로 훌륭하게 상징된다.

동양 의학은 위생과는 언뜻 비슷하지만 다른, 진정한 ‘양생(養生)’의 세계가 아닐까?


세포의 몸속에는 옛날 옛적 독립 생물로 여겨지는 각종 미생물이 다양한 형태로 숨어 있다.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 엽록체, 중심립 등이 대표적이다.

한편 동물의 몸을 보더라도 무수히 많은 미생물이 공존공영하여 기생하고 있다.

나아가 동물계 전체를 보더라도 미생물인 균류(菌類)의 매개 없이 식물과의 교류는 실현될 수 없다.


동양 곳곳에 있었던 살생금지령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래 동양인은 자연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생물 공존의 모습을 지극히 존중했다.

이는 나치스가 유대인 말살 정책을 도모한 것과 명백히 대조를 이룬다.

이 땅에서 살생을 엄금한 것도 결국은 민족의 생리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동양과 서양의 두 세계는 인간의 정신을 뿌리에서부터 지탱하는 쌍벽 기능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처럼 평상복과 하얀 가운으로 상징되는 두 세계의 틈새는 산부인과 병동과 다른 일반 병동 사이에서도 엿보인다. 
임상 실습 시간에 의대생이 처음으로 여러 진료 과를 돌 때,

소아과와 아울러 산부인과 환자 대기실만큼은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다는 사실을 누구나 피부로 느낀다.

‘임신이 과연 병인가?’라는 질문을 치열하게 던지며,

본디 출산이라는 육체 활동이 임신과 마찬가지로 의학의 세계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다는 진실을 충분히 숙지해야 한다.

 


한편 산부인과 분만실의 공기는 이미 팽팽하게 고조되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앞에서 ‘분만실 전체가 거대한 내장으로 변신해서……’라고 표현했는데,

우리는 자궁의 출렁거림에 완전히 휩쓸리고 있었다. 말 그대로 바닷물이 시시각각 밀려오는 광경이었다.


갑자기 ‘퍽’ 소리가 나더니 양수가 주위로 튀었다.

태아의 머리가 내 시야에 한순간 스쳤고, 내 얼굴에 양수 물보라가 일었다.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더니 머리의 가마를 덧그리듯이 아기의 몸이 나선을 그리며 빠져나왔다.


내 몸은 망망대해를 표류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바다’의 세계였다.

그때 양수 물보라가 내 입안으로 들어갔는지 어떤지는 잘 모른다.

구강 점막으로 양수 맛을 맛보았는지 어떤지는 당연히 더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그 당시 해수가 펼치는 환상의 세계 가운데에 내가 녹아 있었다는 느낌만은 지금도 생생하다.

마치 양수를 한 잔 벌컥벌컥 소리를 내며 단숨에 들이켜듯이.


양수는 ‘고대 해수’라는 일종의 신념 같은 것이 어느새 내 몸을 가득 채우게 된 것도 분만실의 그 하룻밤 사건 이후부터였다.

이는 지금 돌이켜보면, 야자열매 이전에 경험한 생명적 회상의, 아마도 유일무이한 대사건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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