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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 뽑은 한 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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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자들의 공동체』_한 단락2015.07.02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인 폐쇄공동체를 형성할 때 

우리는 흔히 우리의 사랑에는 언어가 필요 없다는 인상을 받곤 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서로에게 할 말이 대단히 많다는 듯이 

전화기를 쥔 손이 지치고 귀가 먹먹해지도록 장시간 통화에 열중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애인에게 자신의 가장 사소한 일과까지 자세히 설명해주고 싶은 강박충동을 느끼는데, 

그런 설명은 애인을 떠보기 위한 시험--예컨대, 

나와 사랑에 빠진 여인이 자신의 사무실에 혼자 있을 때 그녀에게 전화해서 떠드는 

나의 그 모든 사소한 설명을 그녀가 진짜로 경청한다면 그녀는 진짜로 나에게 마음을 빼앗긴 사람이 틀림없다--인 동시에 

유혹용 미사여구들일 뿐 아니라 자신의 모든 사소한 일과를 모험이나 오락으로 만들려는 기획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단 그들의 사랑이 확인되고 공인되기만 하면 

그들은 함께 음악을 듣거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무의미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킥킥대기 시작한다. 

그리하는 틈틈이 속행되는 대화는 진지하다. 

여자는 자신의 직업적 근심과 야심에 관해 말하고, 

남자는 학계나 사업계를 대표하는 과학자나 사업가로 성공하기 위한 자신의 진로나 가사분담문제에 관해 말한다. 

이런 진지한 대화는 그들의 사랑을 벗어난 듯이 보인다. 

자신의 연구실이나 사무실에서 겪는 문제들을 자신의 애인에게 진짜로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뭔가 다른 어떤 것을 감지할 때는 그들의 사랑이 식어갈 때이다. 

“어서 말해보세요! 우리에 관해서요! 

나는 당신의 사장에 관한 말이나 집안일로 핑계 대는 말을 이제 더는 듣고 싶지 않아요. 

우리는 우리에 관해서 말할 필요가 있어요!” 

이런 말을 듣는 당신은 실제로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 

말해야 할 사람은 바로 이런 말을 듣는 당신이다. 그래도 당신은 당장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른다. 

심지어 당신이 예전에 이런 상황을 겪었더라도 당신이 예전에 알던 사랑은 이미 식었다. 

당신은 자신이 당장 무슨 말인가--시시한 것들에 관한 말--를 한다고 느낀다. 

 

그 말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당신은 문득 이런 상황을 예전에, 즉 처음 사랑을 시작할 때도 겪었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대학생일 때 토론수업이 열리던 강의실에서 발표자가 당신이냐 다른 학생이냐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본질적인 것은 토론수업이 진행된다는 사실이었다. 

토론수업의 기능은 교수가 그즈음 학계에서 진행되던 권리문제에 대한 정치철학적 논쟁에서 도출한 문제를 명료하게 정리하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그즈음 진행되던 이런 논쟁들에 대한 반론들이나 대안들을 정리하여 발표해야 했다. 

그 자리에서 이따금 당신은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알았어도 다른 학생이 그 말을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왜냐하면 토론수업은 당신이 가진 지식을 자랑하거나 교수의 마음에 들기 위한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 당신의 옆자리에 앉은 어떤 여학생과 당신의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당신은 그 관계가 연인관계로 변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때부터 당신은 그 여학생과 함께 있을 때마다 무슨 말이든 해야만 했다. 

그 말의 내용은 거의 상관없었다. 

본질적인 것은 당신이 말한다는 사실, 

당신의 목소리에 담긴 열기가 ‘그녀가 떠돌던 강의실 바깥에 있을 이름 모를 열정의 구역’으로 그녀를 따라간다는 사실, 

당신의 목소리에 담긴 감수성이 그녀의 나른한 목소리와 공명한다는 사실, 

당신의 눈빛이 ‘과제와 목표들을 벗어나서 에로틱한 어둠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빛’과 마주친다는 사실이었다.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자들의 공동체>

알폰소 링기스, 김성균 옮김, 바다출판사, 2013, pp.172~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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