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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형제의 길》 서문읽기2015.12.01

《그림 형제의 길》 서문읽기

 

 

흔들림 없이 끝까지…… 그렇게 그림 형제처럼

 

 

나는 한동안 길을 잃고 있었다. 인생이 화장실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술술 풀린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잠시일 거라고 생각했던 인생의 대기시간은 마냥 길어져, 길고 어두컴컴한 터널에 갇혀 어쩔 줄 몰라 하는 폐소공포증 환자의 심정처럼 막막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무심코 서가에 있던 《그림 동화집》을 꺼내 읽다가 그중 한 페이지에 눈길이 멈췄다.

 

“죽음보다 더 나은 어떤 것을 넌 찾을 수 있을 거야. 너는 훌륭한 목소리를 지녔고, 우리가 함께 음악을 연주하면 좋을 거야. 우리와 함께 브레멘으로 가자.”

 

〈브레멘 음악대〉에서 자유를 찾아 용기 내어 길을 떠난 당나귀가 우연히 길에서 만난 수탉에게 망설이지 말고 함께 떠나자고 권유하는 대목이다. 여기서 “죽음보다 더 나은 어떤 것(Etwas Besseres als den Tod)”이라는 말은 무력감에 빠져 있던 나에게 충고로 다가왔다. 〈브레멘 음악대〉는 평생 최선을 다해 주인을 도우며 살았지만 이제는 늙어서 쓸모없어진 나머지 주인에게 곧 죽을 운명에 처한 절박한 존재들을 당나귀, 수탉, 개, 고양이, 이렇게 네 마리의 동물로 의인화해서 풍자한 동화다.

위로와 공감이란 이런 것인가. 아무리 힘들고 처절하더라도 함께할 수 있는 친구만 있다면 이겨 낼 수 있다고 하는데, 시간과 공간을 훌쩍 넘어선 친구들이 나와 함께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그림 동화의 주인공들이다. 자유, 용기, 도전이 동화에 담겨 있었다. 내친김에 〈백설 공주〉, 〈헨젤과 그레텔〉, 〈개구리 왕자〉, 〈아셴푸텔(신데렐라)〉 같은 이야기를 다시 읽어 보았다. 그 속에는 인생의 길에 대한 어떤 알레고리가 암시되어 있고, 상징과 비의秘意가 깔려 있었다.

분명한 것은 《그림 동화집》에는 수천 년 혹은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어떤 ‘길’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숲 속의 미로를 헤매고 다녀야 했던 원시시대의 사냥꾼과 나무꾼이 언젠가 다시 찾아올 후예를 위해 지혜의 메시지를 숨겨 놓았다. 유대인의 뜨거운 사막에서 유일신과 《성경》, 《탈무드》가 나왔듯이, 게르만족의 깊은 숲 속에서는 사냥꾼과 마녀, 그리고 메르헨(Märchen)이 탄생했다.

 

“지금 갑자기 왜 동화인가요? 《그림 동화집》은 아이들이나 읽는 것 아닌가요? 모두들 어렵다고 하는 이때 그깟 동화를 말하는 걸 보니 무척 한가하나 봅니다.”

 

내가 그림 형제와 《그림 동화집》을 주제로 책을 쓰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누군가의 반응이었다. 그림 형제가 동화집을 펴냈지만, 단순히 그것뿐이었다면 독문학자도 아니고 아동문학가도 아닌 내가 굳이 이 책을 쓸 이유가 없다. 내가 그림 형제와 동화를 말하려고 하는 까닭은 역설적으로 지금이 위기이기 때문이다. 위기 탈출을 위한 출구 전략이 동화 안에 담겨 있는 것이다. 어른이 되어 읽는 동화는 어릴 때와는 그 맛이 다르다. 그것은 돈과 권력이 지배하고 변칙이 난무하는 세상을 향해 날리는 통쾌한 인생 역전극이니까.

그림 형제가 한국에서는 ‘그림 동화집’이라고 번역되는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옛날이야기(Kinder-und Hausmärchen)》 초판 1, 2권을 세상에 내놓은 것은 1815년,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00년 전의 일이다. 제목에서 상상되는 평온한 분위기와 달리 동화는 태평스럽고 한가한 시절에 탄생하지 않았다. 국토는 외국 군대의 말발굽 아래 시달리고 있었고 형제는 하루 한 끼 식사로 버텨야 하는 일생일대의 위기 상황이었다.

바로 그때 형제가 착수한 작업이 메르헨 수집이었다. 메르헨은 동화로 번역되고, 민간에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 그래서 학술적으로는 ‘민담(民譚)’이라 번역되기도 한다. 형제는 옛이야기 속에 건강한 독일 정신과 로마 군대를 무찌른 게르만 전사의 용감한 기상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림 동화집》은 그러니까 잃어버린 정체성을 되찾는 작업이자 민족의 원형질을 찾아 나선 대장정의 시작이었다. 모두가 큰 것과 위대한 것을 외칠 때, 형제는 작은 것 그리고 내 주변의 것들에 눈을 돌렸다.

동화는 애국 운동과 분열되었던 독일을 통일시키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게다가 《그림 동화집》은 역사상 전 세계적으로 《해리 포터》보다 더 많이 읽혔고, 북극의 에스키모에서부터 아프리카의 스와힐리어에 이르기까지 모두 160개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 미국 할리우드에서는 영화와 드라마, 애니메이션, 뮤지컬로 끝없이 리메이크될 정도로 스토리텔링의 교과서처럼 여겨진다. 그러니 ‘그깟’ 동화라고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림 형제를 그저 동화 작가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은 동화 작가가 아니라 동화를 수집한 학자였다. 도서관 사서로 출발한 형제는 평생 책을 사랑했다. 법학을 전공했지만 동화와 전설 이외에도 언어, 민속, 문학, 역사에 걸쳐 실로 다양한 분야를 연구했다. 그들은 아무에게도 얼굴을 보여 주지 않던 중세와 고대의 신비한 세계를 찾아 떠났던 시간 탐험가였다. 생전에 35권의 책을 썼으며 논문을 포함해 모두 700편에 이르는 놀라운 저작 활동을 했다. 죽는 시간까지 손에서 펜을 놓지 않았다.

독일이 자랑하는 인문학의 든든한 기틀을 구축한 주역 또한 그림 형제였다. 그들은 흔히 게르마니스틱(Germanistik)이라 부르는 독어독문학의 창시자였으며, 독일 최초의 방대한 《독일어 사전》을 편찬하기 시작했다.

위대한 학자이긴 해도 형제는 결코 책상 위의 백면서생(白面書生) 노릇만 하지는 않았다. 군주제에서 공화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괴팅겐 7교수 사건’(1837년 괴팅겐 대학교 교수 7명이 헌법 개혁에 반대하다가 파면당한 사건)에 앞장서는 바람에 해직 교수가 되어 일약 실천하는 지식인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나폴레옹 이후의 유럽 전후 질서를 논의하기 위한 빈 회의와 파리 회의에서는 외교관으로서 역사의 생생한 증인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프랑크푸르트 파울 교회에서 개최된 독일 최초의 국민의회를 이끌기도 했다. 그들은 신문에 열정적인 문체로 칼럼을 쓰면서 수십 개 나라로 쪼개져 있던 독일의 통일운동에 앞장선 언론인이기도 했다.

 

내가 베를린 쇠네베르크 지역의 한 교회 묘지에서 형제를 처음 만난 것은 벌써 20년 전이다. 신문 《타게스슈피겔》에 실린 ‘묘지 기행’이라는 연재기사를 읽은 뒤, 뭔지 모를 감흥에 이끌려 단숨에 그곳으로 달려갔었다. 형제는 베를린의 전형적인 초겨울 날씨인 잿빛 하늘 아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명성에 비해 무덤은 아주 소박했다. 묘비에는 아무런 수식이나 치장도 없이 그저 이름만 쓰여 있었다.

야코프와 빌헬름, 한 살 차이로 태어난 그림 형제는 가장 친밀한 친구이자 연구 동료였다. 그들의 인생은 ‘협업의 위대함’을 웅변하고 있다. 그림 형제만큼 아름다운 우애를 보여 주는 형제는 흔치 않다. 어릴 때부터 가장 역할을 했던 형 야코프는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동생들을 돌보았고, 동생 빌헬름 역시 마흔이 다 되어서야 결혼했지만 그 후에도 형과 한 지붕 아래 함께 살았다. 그들은 평생 가난, 실직, 해직, 전쟁과 침략 같은 거대한 시련과 싸웠으면서도 결코 그런 현실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림 형제는 동화의 길, 인문의 길을 죽는 날까지 흔들리지 않고 함께 걸어갔다.

형제가 나란히 묻힌 교회 묘지를 떠나기 직전 나는 묘비에 손을 댔다. 차가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따스함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그날 나는 수첩에 ‘길’이라는 한 글자를 새겨 두었다. 그렇게 시작된 형제와의 인연은 20년 동안 관련 자료를 모아 둔 서류철만 세 개, 팸플릿과 브로슈어를 담은 큼직한 상자 두 개로 늘어났다. 하루라도 서둘러 형제의 일생을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한다던 나의 계획은 예기치 않게 인생의 진로가 바뀌면서 계속 연기되었다. 그 사이 자료들은 먼지만 수북이 뒤집어 쓴 채 나의 손길이 닿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림 형제와 동화를 따라가는 길을 가리켜 ‘메르헨 길(Märchen Straße)’이라 부른다. 프랑크푸르트 인근 하나우에서 시작해 슈타이나우, 마르부르크, 카셀, 괴팅겐, 하멜른, 브레멘까지 총 600킬로미터에 이르는 환상적인 여행길이다. 메르헨 길이 공식적으로 선포된 것은 1975년 슈타이나우 시청에서였다. 60여 개의 도시와 마을, 그리고 8개의 국립공원도 포함되어 있다. 그림 동화를 좋아하고 그림 형제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최적의 인문 여행길이다.

나는 베를린 특파원 시절에 한 번, 그리고 이 책을 쓰기 위해 다시 한 번 메르헨 길을 걸었다. 붉은 지붕을 한 중세풍의 작은 건물들과 오솔길, 장엄한 숲, 활기찬 시골 시장, 오래된 교회, 위풍당당한 성이 있었다. 할머니 심부름을 하기 위해 외출한 빨간 모자 소녀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고, 숲 속에서는 백설 공주를 앞세운 일곱 난쟁이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 환상적인 길을 걷고 또 걸으며 끈기, 투지, 기개를 뜻하는 단어 ‘grit’를 떠올렸다. 아마도 형제의 인생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이 아닐까 한다.

마침내 나는 형제가 잠들어 있는 베를린의 장크트 마테우스 교회 묘지를 다시 찾았다. 그리고 조용히 ‘길’에 대해 물었다. 형제는 오랜만에 찾아온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너의 발밑을 파라! 그 밑에 보물이 있다!”

 

그렇다. 길은 멀리 있지 않았다. 새로운 길은 지나온 길 위에서 열린다. 오디세우스가 20년 방랑의 미로를 헤매다 귀향에 성공했듯이, 나 역시 20년 동안 돌고 돌아 다시 그림 형제와 그림 동화 앞에 섰다. 걸어왔던 길을 내 색깔로 다시 갈고 닦았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남이 걷지 않은 나만의 길이었다. 보물은 바로 그곳에 있었다.

 

손관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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