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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아의 세계-인류의 생명 기억을 찾아서』 편집후기2014.12.03

 

 

 

《태아의 세계-인류의 생명 기억을 찾아서》 편집후기

경이롭고 따뜻한 체험

바다출판사 기획편집부 김원영

 

 

오랫동안 출판기자로 활동하셨던 한겨레신문 구본준 기자님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셨다.

그가 맺었던 크고 작은 인연들이 하나같이 그의 따뜻한 인간성을 떠올리며 안타까움의 탄식을 내뱉고 있다.

여기저기 애도의 글이 넘친다.

그분이 쓴 몇 권의 책을 읽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알진 못했는데, 그래도 그분이 여태껏 참 잘 살아오셨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가 남긴 책들을 보고 있자니 그가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책이라는 물건은 참 대단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허망하기도 하다.

시내에 있는 큰 서점이나 대학교 도서관에 가면 기분이 묘하다.

누군가 수년간 공들여 쓴 책이라는 삶이 이렇게나 많이 있다.

이 책 중 몇 권이나 읽을 수 있을까. 그나마 끝까지 읽을 확률은 더 낮겠지.

수많은 이의 삶과 노력이 이렇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데,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잠시 눈길을 주는 것뿐이다.

그래서 몇 달의 시간을 들여 한 권의 책을 만드는 일이, 더 경이롭게 느껴진다.


이번에 만든 《태아의 세계》는 특히 이런 감상에 빠지게 했다.

이 책은 1987년에 세상을 뜬 일본 최고의 해부학자인 미키 시게오(三木成夫, 1925~1987)가 1983년에 낸 책이다.

내가 태아이기도 전에 나온 책을 30년도 더 지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내가 인생의 일부를 담아 만들고 있다.

처음에 이 책은 내 담당이 아니었다.

사장님께서 작년에 일본에 가셨다가 미키 시게오가 생전에 남긴 두 권의 책을 들고 오셨는데,

그중 한 권이 이 책이고, 다른 한 권은 《내장과 마음》이었다.

태아, 세계, 내장, 마음.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을 연구했다니, 희한하다 싶었다.

그중 우리 출판사와 인연이 닿은 책은 이 《태아의 세계》다.


몇 달이 흘러 번역원고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파일을 열어 보았다.

태아는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열 달이란 시간을 보낼까. 어떤 세계를 갖고 있을까.

처음에 떠올렸던 그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나는 이 원고에 금세 빠져들었다.


둘째 아이가 아파서 젖을 못 물고 있을 때,

아내의 부풀어 오른 젖가슴을 위해 모유의 맛을 보게 되었는데

그 사건으로 자기 몸에 각인되어 있던 ‘생명 기억’의 영감을 얻었다는 이야기나,

두 아이를 가진 아버지로서 태아 표본병을 바라보며 주저했던 마음,

태아를 처음 해부할 때 손끝에 느껴졌던 푸딩 같은 감촉, 그리고 놀라운 발견까지.

반세기 전을 살았던 이 해부학자가 보낸 순간들이 너무도 가깝게 느껴졌다.

나는 편집부 사람들을 설득해서 이 원고를 담당하기로 했다.

 


우리는 우주와 이어진 존재다

이 책을 쓴 미키 시게오는 거대한 우주 속에서 수십억 년간 진화해, 이 자리에 서 있는 인간에 대해 생각한 사람이다.

그는 우주에는 어떤 리듬이 있고, 그 리듬은 인간의 몸에도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분명…… 상어의 얼굴이다!”

그는 수정된 지 32일된 인간 태아를 해부하다 마주하게 된 태아의 얼굴을 보고 낮은 탄성을 질렀다.

36일째에는 고대 파충류 ‘투아타라’의 모습이 보였고, 38일째가 되어서야 비로소 포유류의 모습을 발견했다.

어류에서 파충류, 포유류까지.

인류의 먼 조상이 고생대 말미에 얕은 물에서 살던 여정을 마치고

완전히 상륙하기의 1억 년 세월이 태아의 얼굴에서 일주일간 재현된 것이다.

 


수정된 지 각각 32일, 34일, 36일, 38일된 태아의 얼굴 정면.

어류에서 파충류의 형상을 거쳐 포유류로 정착하는 척추동물 상륙의 역사가 태아의 얼굴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마지막 자연철학자, 미키 시게오의 역작

미키 시게오는 이렇게 인간 진화의 역사가 어떻게 몸에 드러나는지를 확인했다.

그는 이런 연구를 모아, ‘리듬의 생명관’을 완성했다.

“모든 생물은 태곳적 우주의 리듬, 생명의 근원적인 리듬을 품고 있는 소우주다.

연어가 몸속의 신비로운 기억을 더듬어서 산란을 위해 강을 거슬러 올라가듯이,

인간도 본디 대우주와 공진하는 생명 기억을 갖추고 있다.”

그가 남긴 필생의 연구는 서구 근대의 기계론적이고 실증주의적인 과학과 궤를 달리한다.

그것은 오히려 도교의 ‘도’ 사상이나 불교의 ‘공’ 사상과 연결되어 있다.

태아에 대해 과학적으로 많은 정보가 밝혀졌지만

《태아의 세계》가 새로운 고전으로 자리 잡아 널리 읽히는 까닭도,

일본 지성인들이 미키 시게오가 주로 활동한 분야가 과학계였음에도

자연철학자, 사상가로 높이 추앙하는 까닭도 이 ‘리듬의 생명관’ 덕분이다.


이 책은 누가 읽게 될까? 과학교양서 독자인가, 인문서 독자인가?

편집을 마무리하는 데 끝까지 붙들고 있던 의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사실 그 질문은 애초에 잘못된 것인지도 몰랐다.

과학과 인문학이 명확히 나뉘기 전, ‘자연철학’ 분야의 책이었기 때문이다.

전후 일본 사상계의 거목인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추모집에서 이렇게 말한다.

“선생의 작품이 새로운 자연과학의 길을 개척하는 방향으로서 인정받기 시작했을 때, 선생은 아쉽게도 갑자기 돌아가셨다.

나는 무심코 일본의 마지막 자연철학자가 세상을 떠났다며 혼잣말을 했다.

미키 선생님은 자연과학자이면서 자연철학의 세계에도 깊은 관심을 나타낸 옛 교양인의 마지막 세대다.

(……) 선생님이 뿌린 씨앗은 점점 확산되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자연과학과 자연철학이 연결될 것이라는 선생님의 오랜 믿음이 실현될 때

근대화를 추진하고 오랫동안 고생해온 이 시대에 진정한 새벽이 열릴 것이 틀림없다.”

 


잘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미키 시게오가 세상을 뜬 지 3년이 지난 1989년, 과학자와 철학자, 예술가 등

100여 명이 힘을 모아 《미키 시게오 추모집》을 펴냈다.

그의 연구 성과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그때부터 거의 매년 ‘미키 시게오 심포지엄’을 열고 있다.

그것은 점차 더 확대되어 갔다.

해부학, 생물학은 물론이고 보건, 보육, 교육, 예술 분야까지,

그가 영향을 미친 분야의 폭이 드넓을 뿐 아니라 점차 영향력이 강해졌다.

그가 생전에 남긴 책은 두 권이지만, 그가 남겼던 강연록과 칼럼들을 모으고 발전시켜

이후 대여섯 권의 책이 더 나와서 계속해서 널리 읽히고 있다.


미키 시게오는 강의할 때, 뱃속에서 들었던 엄마의 심장 소리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그 소리를 들으며 경이로웠던 태아의 순간으로 돌아간다.

그가 우리에게 되살려주고 싶었던 것은 이렇게 자연 상태의 기억이다.

책을 만드는 내내 따뜻한 체험을 한 듯했다.
잘 산다는 것이란 어떤 것일까.

세상을 먼저 뜬 이들이 남긴 따뜻함에서 하나의 답을 얻은 요즘이다. 

 


 

미키 시게오가 젊었을 때 모습. ⓒ 미키 모모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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